제      목: [Critic]열도일주 풍물기행전-이재언
이      름: Webmaster
작성일자: 2011.04.18 - 17:47
작가의 면면이 그대로 묻어나는 <열도일주 풍물기행전>

<고데기>(高德里) 시리즈와 연작으로 유명한 서양화가 김명식 회화의 영감은 언제나 자연에서 발원된다.

자연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지만, 그 자연이라는 것도 각각이 경험하는 한계 내에서의 것이기 마련이다. 작가의 자연이 인간의 발걸음을 허락지 않는 청정무구의 자연을 벗 삼으며 사색하고 관조하는 그런 류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이상향으로 그려지는 대상은 아니다.
작가에게 화두가 되는 자연은 인간이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이 없는 원시적 자연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으며, 상당 부분 문명과 어느 정도의 긴장 관계 속에 있는 자연이다. 누가 뭐래도 작가는 인간과 자연이 아름다운 상생의 삶을 누리는 이상을 꿈꾸는 예술가이다.

고데기 시리즈에서 보듯 작가는 난개발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고향의 자연을 그리워하면서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담담하고도 비장한 필치로 그려내곤 했다.
모종의 상실이 주는 아픔은 담장 안에 웅크리고 피어 있는 이름 없는 꽃들조차도 그립게 한다. 개발 이후 그 어떤 고대광실의 안락함으로도 달랠 수 없는 상실감이야말로 이름도 없이 피어 있는 꽃들에 애착을 품게 했던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 배경 때문일까, 평온한 대상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배경의 표정들이 예사롭지 않다. 내면에서 분출하는 무언가를 애절하게 토로하는 듯, 뭉클하게 잡히는 것이 있다.

2천년대 접어들어 작가가 교환교수로 뉴욕에 체류하면서부터 <이스트사이드 스토리>연작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작가의 화면은 보다 도시적인 이미지들이 오버랩되기 시작한다.
자연 위에 터를 잡은 문명 혹은 공동체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다. 작가도 피력한 것처럼 <고데기> 연작이 뜰 안의 자연이었다면, <이스트사이드 스토리>는 뜰 밖의 자연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연 자체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생략되거나 숨겨지지만 자연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자연스럽게 인종 혹은 지역 문제로 옮겨진다. 비슷한 양식의 집들이 줄지어져 있는 가운데 집들의 표정은 의인화되어 있다. 여러 인종들이 모여 사는 환경 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하나의 자연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동서, 빈부, 노소, 흑백이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이상을 담담하게 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지난 해 일본에 1년간 체류하게 되면서 북쪽의 호카이도에서부터 남쪽의 큐슈까지 일주를 하여 담채 풍물화를 60여 점 그려냈다. 1년여의 기간 동안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열도인의 삶과 풍경을 직접 답사하여 상큼하고 정감 넘치게 그려낸 것이다. 마침 구마모토 초대전이 막 끝난 지난 2월, 필자가 큐슈 자전거 여행을 갔다가 후쿠오카에서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작가는 역시 평상시대로 답사, 그림, 전시 등의 세 가지에만 몰입해 있었다. 뉴욕 체류시에도 그랬던 것처럼 활력적으로 움직임으로써 일본 내 유수 갤러리들에 초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단기 체류자로서 전례가 드문 케이스임에 틀림없다.

큐슈에서 만난 그때 전시 자료와 풍물화 몇 점을 볼 수 있었다. 그림들을 펼쳐든 순간 전에 강한 인상을 준 바 있었던 유럽이나 호주 풍물화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삶을 작가만의 개성적 필치와 색감으로 그려낸 예의 그림들을 다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일본 여러 곳에서 전시를 열 때마다 그곳에서의 반응과 열기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일본 애호가들이 한 작가의 작품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대표성 있는 페인팅보다는 판화나 드로잉 등에 더 관심을 많이 갖는 것 같았다. 가볍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작가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은 동북 대지진과 핵 오염으로 말미암아 언제 다시 전역 답사의 기회가 또 올 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그 컬렉션의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계절과 지역별로 다양한 풍물들이 체험적으로 그려진 것이기에 작가의 풍물화가 다른 페인팅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이러한 작가의 풍물화나 인체 크로키 등의 습작들은 작가의 페인팅과 종합적으로 묶어서 볼 때 더욱 경험이 고조된다. 드로잉에는 어떤 양식에 갇히는 느낌의 것을 완전히 털어내고 그야말로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마음껏 발산하며 토로하는 솔직함을 강점으로 하고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작가의 일상 행적이 그대로 묻어나기도 하고, 작가의 따스한 온기와, 그리고 밑바닥에 내재해 있는 작가의 감각으로부터 생성되는 필치를 통해 교감할 수 있는 신선함이 있는 것이다.

비록 익히 보아온 대표성 있는 페인팅만큼 밀도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부류의 작업은 밀도보다는 다른 작업에서 보여주지 못한 또 다른 근성과 재능의 면면들을 확인시켜 주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크로키나 드로잉을 본 상태에서 바라본 <이스트사이드 스토리>와, 보지 못한 상태에서의 것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우리는 한 작가가 캔버스에 모든 것을 쏟아낸 대표성 있는 페인팅과 그런 전시에만 익숙해 있다. 하지만 작가가 일기 쓰듯 소소하고 담담하게 그려낸 드로잉 종류가 곁들어졌을 때, 작가의 진면목이 더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조명된다. 후자의 영양가는 아무래도 제스츄어가 제거된, 보다 솔직한 육필이 살아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마침 이번에 갖는 전시는 작가의 귀국 보고전을 겸한 것으로, 이전의 <이스트사이드 스토리>과 함께 일본 일주 풍물화들이 함께 출품된다. 선화랑에서 갖는 세 번째 전시지만, 아마도 가장 볼거리가 풍성한 것이 이번이 아닐까 기대된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상생의 이상을 꿈꾸는 작가가 우리에게 역설하는 바로 그 주제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가장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식사로 치자면 이제야 우리는 정식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재 언 (미술평론가)